지자요수인자요산
논어(論語)옹야(雍也)편(篇) 21장(章). 지자요수(知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
[원문]
子曰 知者樂水하고 仁者樂山이니 知者動하고 仁者靜하며 知者樂하고 仁者壽니라
자 왈 지 자 요 수 인 자 요 산 지 자 동 인 자 정 지 자 락 인 자 수
[해독]
공자께서 말했다[子曰]. “슬기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知者樂水],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仁者樂山]. 슬기로운 사람은 움직이고[知者動] 어진 사람은 조용하며[仁者靜], 슬기로운 사람은 즐기고[知者樂] 어진 사람은 수(壽)를 누린다[仁者壽].
※ 한자
* 공자가 시인이 되어 지자(知者)와 인자(仁者)를 읊고 있다. 지자는 현실적이고 인자는 이상적이다. 사물의 득실(得失)을 냉철하게 생각하는 지자는 항상 시공(時空)에 따라 유동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래서 지자는 쉼 없이 의식을 형상한다.
그러나 인자는 사물의 득실을 떠나 만물과 더불어 변함없이 사랑하면서 존재한다. 지자는 현실에 적응하는 지성(知性)을 갖추고 실존하기를 바라지만, 인자는 항상 온갖 것들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덕성(德性)을 지니고 존재하기를 바란다. 지자는 선악(善惡)을 가려 분별하지만, 인자는 선악을 분별하려 하지 않는다. 인자는 만물과 더불어 동고동락(同苦同樂)한다. 그래서 성인은 모두 인자이다. 지자로서 성인은 없다. 성인은 모두 다 인자일 뿐이다. 그래서 성인은 불사(不死)한다. 인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노자와 공자를 가릴 필요가 없다. 다만 공자가 지자를 긍정(肯定)하는 성인이라면, 노자는 지자를 부정(否定)하는 성인이다.
슬기로울 지(知), 좋아할 요(樂),물 수(水),어질 인(仁),뫼 산(山),
* 요(樂) ; 호(好)와 같다. 이런 뜻일 때는 낙(樂)이나 악(樂)이 아니라 요(樂)로 읽는다.
* 지자(知者)는 물에, 인자(仁者)는 산에 비유하고 있다. 물은 동적(動的)이고 산은 정적(靜的)이다. 물은 현실에 따라 적응한다. 비탈이면 폭포가 되고 들판이 되면 유유히 흘러가는 물. 이처럼 물은 제 모습을 현실인 주변 환경에 맡긴다. 그서나 산은 변함없이 그냥 그대로 같은 모습니다. 지자는 변화(變化)하고 인자는 여일(如一)하다. 지자는 항상 쉴 새 없이 의식(意識)하고 인자는 한결같이 만물을 사랑한다.
움직일 동(動), 고요할 정(靜), 즐거울 락(樂),목숨 수(壽)
* 수(水)에 비추어 지자동(知者動)의 동(動)을 유추하고, 산(山)에 비추어 인자정(仁者靜)의 정(靜)을 유추하면 된다. 동(動)을 활동(活動)으로 새기고, 정(靜)을 정숙(靜淑)으로 새겨도 된다. 이 동(動)을 강(剛)으로 새기고, 정(靜)을 유(柔)로 새겨도 좋다. 지자는 사물을 향해 굳세고, 인자는 목숨을 향해 부드럽다.
* 지자락(知者樂)의 낙(樂) 역시 수(水)에 비추어 유추하고, 인자수(仁者壽)의 수(壽) 또한 산(山)에 비추어 유추하면 된다. 온각 곳을 지나 흘러가는 물을 상상하면 그 물길이 변화를 떠올리게 해준다. 지자는 온갖 변화를 사물(事物)에서 즐긴다. 그러니 지자락(知者樂)이 아닌가. 여기서 낙(樂)이란 변화무쌍한 사물을 즐긴다는 뜻으로 들어도 된다.
* 그러나 산은 멈추어 제 모습을 누린다. 그러니 인자수(仁者壽)가 아닌가. 수(壽)는 목숨을 즐긴다는 뜻으로 새겨 들어도 된다.
* 지자는 사물을 즐기고, 인자는 목숨을 즐긴다. 목숨을 즐기는 일이 사랑하는 일 아닌가. 인자수(仁者壽)의 수(壽)를 그냥 인도라고 새겨도 된다. 인자란 누구인가? 변함없이 사랑하는 길[仁道]을 걷는 분이다. 수(壽)는 천명을 다 누린다는 말로 들어도 된다. 수(壽)를 누려라. 이는 어질게 살라 함이다.